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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W
빛바랜 추억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본문
여름이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는 대나무로 된 발이 닫혀있던 문을 대신했고, 조금의 여윳돈이라도 생기면 엄마 몰래 슬그머니 발을 들추어내고 나가 또 다른 골목 한 구석에 있던 조그마한 구멍가게로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담배'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그곳이 가게임을 부끄럽게 알려주는 듯 했던 공간에는 열려진 유리문 밖의 나무침상에
걸터앉아 더위에 이골이 난 듯한 표정으로 연신 부채질하시던 풍채 좋으신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그 옛날 빨래터에서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어머니들과 나누던 몇 마디 말이 어느새 수다가 되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구멍가게 할머니의 하루. 보물 가득했던 가게 앞에서 무엇을 살까 수없이 고민하던 나에게 한움큼씩 쥐어주시던 오색찬란한 무늬로 덮인 작은 박스안의 눈깔사탕과 입안 한가득 훌훌 털어 넣으면 시릴 만큼 새콤했던 오렌지 빛 과자와 지금은 사라진 종이 포장의 우유맛 아이스바. 어린 마음에 구멍가게 주인이라는 거창한 꿈을 꾸었을 만큼 가지고 싶었던 갖가지 물건들로 가득 찬 유리문 안쪽의 작은 공간에서 주머니 속 동전과 바꾸었던 것은 단지 몇개의 불량식품이 아니라 그 시절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가슴 한가득의 꿈과 재미가 아니었나 싶다.
무엇이 그리도 신났는지 몇 안되는 골목 친구들과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던 좁은 골목길에도 노을은 진다. 그리고 항상 그맘때 쯤 나타났던 리어카 끄는 할아버지. 낡고 커다란 가위를 착착 흔들어대며 넘어갈 듯 쉰 목소리로 '고물'을 외치던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어디론가 숨어서 숨죽인 채 그가 어서 골목을 빠져나가길 바랬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졸라 모아둔 고물을 팔아 달디 단 호박엿과 바꾸어오기를 바랬던, 그리고 또 한 해가 지나 무서워 숨기보다 그 앞을 후두두 뛰어가며 무어라 놀려대던 나와 동무들의 행동은 '어림'으로 이해되고 용서될 수 있을까? 낡은 옷과 땀으로 뒤범벅이 된 할아버지를 문간으로 불러 시원한 설탕물을 타 주시던 할머니의 따스함을 지금에서 보기 힘듦에 그 때가 더 그리워지는 것은 아닐까?
비록 어린 다섯해의 시간을 보냈고, 또 다른 장소에서 훨씬 많은 해의 기억을 모아나갔지만 그 곳은 새로운 시간으로는 덧칠할 수 없는 묘한 향수로 남아 아직도 가슴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때로는 희뿌연 망각의 안개에 가려져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강 저편에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음에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바로 지금, 생각하며 깨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미래의 길을 건너며 현재를 과거로 만들어가는. 어찌 보면 참 냉정한 일이지만,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웃음 짓는 일 만큼은 지나치는 과거에 미안함의 사과 한마디를 건네는 일 같아 흐뭇한 느낌을 받곤 한다. 과거는 기억하면 다시 돌아와 머리로 떠올리고 가슴으로 추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갈 수 없음에, 그리고 빛바랬기에 소중한 추억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200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