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EW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본문

머리에서/그건그래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생각의탄생 2008. 11. 20. 15:05
1. 꿈

‘아차’ 하며 무언가에 소스라치게 놀라 번쩍 하고 눈을 뜬 것은,
밤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조용하면서도 매섭게 달려가는 새벽의 어느 시간 즈음 이었다. 3월. 봄이었지만 여전히 찬 밤의 공기 때문에 그 전날까지만 해도 따뜻하게만 느껴졌던 두터운 솜이불 속의 나는 식은땀으로 온 몸이 흥건히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이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닫고서는, 그제서야 싸늘하게 식어버린 새벽과는 어울리지 않게 창문을 활짝 열고 온몸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꿈을 잘 꾸는 편이기에 머릿속에서는 그야말로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지곤 하지만, 깨어나는 순간 바로 소멸해버리는 기억 아닌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생생하여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게 나를 붙들어 두고서는 성호까지 긋게 만들더니, 몇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기억에서 맴돌고 있다.

 사람을 죽였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말로는 내뱉어본 적이 있었지만, 비록 꿈이라 해도 기억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후에 해몽서적에서 찾아보기를 피는 길조를 상징한다 했지만, 위안이 되기는커녕 온통 붉은색이었던 그 꿈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기분은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다. 왜 그랬는지 전후 사정에 대한 꿈의 기억이 잘려나간 사실보다 더 답답한 것은,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너무나 태연했던 모습만큼은 뚜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억울했다.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무섭기까지 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던데. 나도 모르는 내 마음속 어디에선가는 살인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또 다른 내가 함께 자라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아니겠지 하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본래 ‘인간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이 진리‘처럼’ 보이는 대명제는 사실 요즘, 아니 오래전부터 그저 갖다 붙이기 좋은 허울뿐인 말 한마디로 전락해버렸거니와, 그렇게 될 만 하게도 온갖 더러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모든 행위의 중심이요 나침반이 되어야 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생각을 애매하게 남겨둘 수는 없었다. 비록 꿈이었지만, 어쩌면 나의 가상 살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려 면죄부를 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게 된 사연은 대강 이와 같다.

2. 죄

 주인공은 인간을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평범한 인간과 비범한 인간.
전자의 경우 늘 복종 위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고, 따라서 법률을 초월한 권리는 물론 가질 수 없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자기 사상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경우 법률을 초월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라스콜리니코프(이하 로쟈)가 노파를 살인한 것은 사회에 불필요한 인간은 제거해도 좋다는 자신이 설정한 대의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가 비범한 인간이 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앞서 인간은 구별될 수 있는가? 없다. 이것은 애초에 잘못된 가정이다.

 모든 범죄는 인간의 욕심과 우월감이 표출되고, 경제적 개념이 인간에게로 옮겨지면서 시작되었다. ‘생명’ 하나만으로도 존엄하고 존중받으며 모두가 평등해야 할 인간의 가치가, 바로 그 인간이 만들어낸 수천만 가지의 이유로 짓밟히고 무시당해온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모두가 동등한 생명의 고귀함을 가지고 있고, 어떠한 경우에도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빼앗아서는 안된다. 이것을 무엇보다 쉽고 명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수단은 종교이다. 인간과 신의 영역으로 나누어 생명에 대한 권리를 신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순간, 그것을 침범할 수 있는 어떠한 예외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어 마땅한 인간은 없다. 공동체 사회이므로 합의된 바에 따라 법을 통해 서로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있으나, 생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므로 인간이 이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허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기본’적인 전제를 알면서도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종교가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라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교 스스로가 종교를 넘어 무소불위의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 유럽의 역사이기도 하거니와, 노예제도를 포함한 신분제 사회가 없어진 것도 불과 한 두 세기 전의 일일 만큼 우리가 ‘존엄’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현재도 경제적 논리를 앞세운 新신분제 사회임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총기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미국, 국민 건강을 포함한 인권보다 경제적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어느 나라의 정부 등과 같은 예를 수도 없이 목격하는데 하물며 이 작품이 쓰여진 19세기에 있어서랴.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선교자 피랍 때의 국민 여론이나, 최근의 아동 강력 범죄와 같은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나 기본적으로 인간 존엄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갈등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판단을 경계하는 입장이지만, (예컨대 사형제에 대한 반대와 같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기본적인 존엄성에 대한 인식의 유무이므로, 그 개념이 바로잡혀 있다면 적어도 주인공과 같은 판단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3. 벌

 “만약 평범한 사람이 자신을 비범한 사람으로 착각하여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지방 예심판사로 끝까지 로쟈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포르피리의 질문에 로쟈는 아래와 같이 답변한다.
 “사회는 유형이며, 감옥이며, 징역 따위로 충분 이상으로 보증되어 있지 않습니까?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자신의 과실을 자각한 이상, 자기 스스로 얼마든지 고민해도 좋습니다. 이것이 그 친구에 대한 벌이니까요.”

 권선징악의 결말에 익숙했던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로쟈는 끝까지 비범인에 대한 미련을 가진 채 자신의 죄를 완전하게 뉘우치지 않는다. 그가 자수한 것도 그의 결심 보다는 소냐의 권유에 따른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이야기한 ‘양심’에 의해 벌을 받고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 그에게 나타난 정신착란과 불안. 혹 이 세상에 진정한 비범인이 존재하고 만약 그가 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이러한 증상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동양사상에 비유하자면 ‘성선설’과 비슷하다 할까.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선. 여기서 말하는 양심이 곧 신이 부여한 자기통제장치이자 동시에 스스로에게 벌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주인공이지만, 사고를 당한 이의 가족을 위해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거리낌 없이 주는 등의 선한 행위는 주인공이, 아니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희망 즉 양심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죄는 마치 끝없는 먹이사슬과 같다. 다른 점은 그것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범주 안에서 발생하므로 상위와 하위의 구분 없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된다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아담과 이브의 원죄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이 죄는, 안타깝게도 어린왕자와 같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이 남게 될 그날까지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처벌보다 예방의 목적으로 법이 존재하듯, 양심 역시 어두워져가는 세상을 향한 마지막 남은 등대요 등불이라 할 수 있으리라.

 4. 작품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

 #1. 위험한 착각
 작품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죄를 저지를 때 보여지는 인간의 나약한 행태이다. 즉, 이런저런 이유로 구차하게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궁리해두는 일 등인데, 예를 들어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르기 전 술집에서 노파에 대해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건과 같은 설정을 말한다.
 평소와 같으면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들도, ‘왜 하필, 왜 이 시간에, 왜 내게’ 하며 결국엔 모든 것이 필연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는 행동들은, 뒤집어보면 다른 ‘사람’ 들에게서는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인정받고자 하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는 상황 설정이 아닐런지.

 #2. 벌과 죄
 죄와 벌. “A와 B” 라는 동등함의 표현임에도 “벌과 죄” 보다 이것이 더 익숙한 것은, 두 단어의 당연한 인과적 관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이 따른다.” 라는 내용보다
 “누군가를 벌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해석하고 나니,
결국 죄도, 벌도 없게 되는 “벌과 죄” 라는 후자의 제목에 더 정이 가기도 한다.

 #3. 작품으로 들어가서

  작품을 통해 죄와 벌에 대한 명쾌하진 않지만 다소 규범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했으나, 사실 주인공의 행위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를 동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비록 꿈이었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안도감을 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아무리 양심을 외치지만 사회악에 대한 극단적인 처벌을 바라는 또 다른 나의 내면의 환호가 뒤섞여 있다. 대리만족. 비록 마음속의 일이지만, 폐륜의 범죄가 빈번히 발생하는 사회를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것을 정당화해줄 수 있을까?

 이미 한 세기는 훨씬 더 지나버린 작품인데다 분량상 조금은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런 우려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로쟈가 살인을 저지르기까지의 심리, 상황 묘사가 마치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추격자를 다시 보는 듯 실감났기 때문이다. 그가 문 뒤에 숨을 때 함께 숨고, 죄를 알면서도 그를 동정하며 함께 항변하는 내 모습을 보니, 역시 대 문호의 명성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언어’라는 제약으로 인해 작품의 섬세함은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몇 권의 책 중에서 앞부분 몇 장을 들춰보며 가장 마음에 드는 문체를 선택하여 읽었고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역시 한글 문학을 접할 때 그 ‘문자’에서 곧바로 전해지는 감동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것은 첫째로 그 나라의 언어를 배워 번역을 거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사실상 현실적인 제약이 따르므로, 이것을 최대한 상쇄하기 위해서는 향후 외국의 문학작품을 접할 때에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번역과 문체 역시 신경써야할 부분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또,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발걸음만 따라가다보니 다른 등장인물들을 포함하여 작품을 넓게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동생인 두냐의 주변에 있던 두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치졸한 행동들이나, 결혼을 결심했던 루쥔의 비인격적이고 억압적인 행동들은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거니와, 주인공의 행위들을 정당화시켜줄 사회적 배경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다시 읽을 때는 로쟈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러한 배경의 인물과 내용들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 계획이다.

5. 작품비교 : 영화 데드맨 워킹


  데드맨 워킹은 한 사형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것을 함께 한 수녀로 인해 점차 죄를 뉘우치고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오래 전 봤던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수녀의 모습에서는 소냐가, 사형수의 모습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투영되어 나타났다.

 사형을 앞둔 사형수가 최후의 수단으로 수녀님에게까지 도움을 청하지만, 처음에는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이며 피해의식 가득한 그에게 존경심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수녀님을 희롱하던 그였지만, 사형수를 돕는다는 사회적 편견을 뒤로하고 끝까지 그를 도와 영적 안내자까지 도맡은 수녀의 모습을 보고서는 크게 감명받아 종국에는 죄를 뉘우치게 된다. 완전한 뉘우침의 결말을 보인다는 점에서 작품 죄와 벌과는 차이를 보인다.

 성서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작품과 영화의 공통점은 두 사람의 관계뿐만 아니라, 언제나 교화의 주체이며 선의 상징인 인물은 창녀(소냐), 수녀와 같이 가장 낮은 곳에 임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두 직업이 극과 극의 성격을 나타내지만, 죄와 벌에서 그리는 소냐의 모습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 자기 희생의 표본으로 그려지고 있으므로 분명 닮아있다 하겠다.

 사실 이 영화는 수잔 서렌든과 숀펜의 놀라운 연기뿐만 아니라 ‘사형제도’를 전면으로 다룬 것으로 더 유명하다. 즉, ‘인간이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사형 폐지론의 입장이지만 피해자 부모의 참담한 심정도 함께 그려냄으로써, 사형 존치론의 입장도 모두 고려해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 ‘사형수 입장’ 후 용서를 빌며 참회하는 숀펜의 연기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사이사이에 살인 장면을 다시 끼워 넣는 영화의 흐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실 앞선 글에서는 왠지 쉽게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영화와 같이 실제로 내 가족이 피해를 입었다면 어떻게 행동할까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흉악한 범죄를 보면 사형을 존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와, 사형을 집행하는 모습에서 눈물을 흘리는 나 사이에는 분명한 괴리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뜨거운 양심 이외에 신이 내 가슴에 심어준 또 다른 선물인 ‘용서’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고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의 존귀함을 흔들지 않는 나만의 직관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과정이 앞으로 내게 남은 인생의 과정이 되리라. 어렵겠지만 반드시 찾아내리라.

덧.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과 타 작품과의 비교. 마지막 학기 예술론 레포트.
처음 계획은 거창했지만, 미루고 미루다 결국 초등학생 감상문 수준이 되어버렸음.
얼마전 데이비드 게일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사형제도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