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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과 오해와 어른의 삼각관계

생각의탄생 2008. 3. 1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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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때였나 고등학교때였나 아무튼 국어 교과서에서 보았던 글로 기억
하는데 무엇인가 하니 소설가 계용묵 선생의 구두라는 수필이다.

구두 수선을 하여 뒤축에 없던 커다란 징이 생겼는데 흡사 말발굽 소리와
같아 신경이 쓰이던 어느날. 앞서가던 한 여인이 나의 발소리를 듣고는
놀라 발걸음이 빨라져 분주한 걸음걸이로 힘껏 달아난다. 자연스러운 구두
소리이니 안심하라 말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억울하다 생각하던 때에,
그 여인이 한 골목으로 내닫으며 추격전 아닌 추격전은 일단락 된다.

짧은 수필임에도 '또각또각'하는 구두 발걸음 소리라던가, 007시리즈
버금가는 숨막히는 추격전의 실감나는 표현이라던가, 아무튼 어린 내
기억에 남았던 것은 그 느낌일 뿐 '공감'때문은 아니었는데, 어느날
밤인가부터 나도 나의 발걸음 소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처럼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도
드물만큼 참 서글픈 일. 뒷서가는 이가 계속 자신의 발걸음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드시 구두와 지면의 합창소리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같은 아파트
단지내로 들어가는 몇 안되는 사람중에 내가 유일한 남자이거나,
어두운 색의 옷을 입은 날 일정 거리 이상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게
된다면 (게다가 걸음걸이가 빨라 자꾸만 간격이 좁혀지는 경우)
참 난감하기 그지없는데, 이럴 땐 조금 먼 길을 돌아간다 하더라도
다른 길로 먼저 방향을 꺾어 '안심'시키곤 한다.

글쓴이는 세심한 것까지 신경써야 하는 불신 풍조에 대한 세태를 비판하였지만
이 글이 쓰여진 55년에 비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는 워낙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만한 오해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는 한다.
다만 그런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둠이 내린 밤 나를 포함한 남자들의 발걸음과 그로 인한 오해와
그로 인해 어른이 된 나를 바라보는 나에 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