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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당신이 잠든 사이

생각의탄생 2007. 11. 22.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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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
(5차 공연 2007.10.13 토 4:30)

교양 드라마와 문화 교수님 과제로 제출했던 감상문.
누구는 과제가 많다고 하던데, 이런 과제라면 매주 해도 좋아.

* 스포일러 있습니다. 아직 못보셨다면 나중에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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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감상문 과제가 커플들에게는 문화생활도 즐기고 과제도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기회였다면, 수컷 싱글인
나에게는 가을철 남성 탈모를 의심할 만큼 고민을 안겨주었던 곤혹스러운 대상이었다.

‘혼자 볼까? 아니야. 아직 우리 사회는 혼자 연극을 보는 처량한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봐주는
너그러운 시각이 결여되어 있어! 그렇다면 남자끼리는? 음.. 차라리 혼자 보는게 어때?’

 여자끼리는 팔짱끼고 다녀도 문제될 것 없지만, 만약 남자끼리라면 당장 커밍아웃 해야 하는  그런 남녀
불평등한 사회적 시각과 정부의 무능력함을 탓하며 겨우 섭외한 성별 女의 고등학교 동창. 이 자리를 빌어
화창한 주말 오후를 반납하고 고맙게도 차려진 밥상의 수저를 덥썩 들어준 그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글을 시작할까 한다.

 본 뮤지컬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자면 한 병원에 새로 부임한 베드로 신부가 갑자기 사라진 인물 최병호의
행적을 쫓는 이야기이다. 병원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특집 프로그램의 예고편에 이미 소개된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인물. 그날의 행적을 찾기 위해 찾아간 602호 병실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신부 자신의 이야기를 포함한 그들의 과거 혹은 현재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때로는 큰 웃음을, 때로는 감동과
눈물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제목과 클라이막스를 구성하는 주요 내용은 새로운 간병인으로 온 딸 민희와 최병호씨의 만남이지만 사실 각자의
테마를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보여준,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특별히 한 가지 이야기를 뽑기
힘들만큼 모두가 기억에 남지만, 나도 남자인지라 관능미를 뽐냈던 알콜 중독자 숙자의 젊은 시절 회상씬과, 양성
평등 차원에서 박 베드로 신부님이 숨겨둔 댄스와 노래실력을 뽐냈던 (가장 신났던) 장면을 베스트로 뽑고 싶다.
이밖에 기억에 남는 느낌들은 그 주제별로 나누어 이야기해볼까 한다.

 #1. 배우들의 1인 다역과 가수 멱살 잡는 노래 실력.

 왠지 환호성을 질러야 할 것 같은 가슴 가득했던 희열을 모두 술에 풀어서인지, 다음날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배우 한명이 맡았던 배역들을 모두 써내려가지 못했었다. 그 정도로 같은 무대 위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배우들의 변신이 완벽했었는데, 각자 본인의 과거 회상신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도 감초처럼 등장해
재미를 주었던 모습이 생생하다.
 가장 먼저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던 것은 매번 “똥쌌어”를 외치던 최길례 할머니가 과거 회상씬에서 천상 소녀의
모습으로 등장했을 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과 순박한 표정을 지으며 무대에 나왔을 때는
정말 순간적으로 반할 정도였다고나 할까.
 또 박 베드로 신부가 다른 세 명의 여인과 함께 젊은 최길례를 탓하는 밉상 ‘계집애’로 여장을 했던 모습이나,
바람기 가득해 보이는 느끼남 닥터리가 열여섯의 순진한 소년으로 변신한 모습이 모두 이 한 장면에 들어가
있으니 다른 장면들은 오죽하리.  관람수칙 하나. 등장하는 배우는 단 7명. 어린 시절 ‘월리를 찾아라’에서 느꼈던
사람 찾기의 재미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으니 매 순간 긴장을 늦추지 말고 배우들을 뚫어져라 관찰할 것.
 두 번째로는 그들의 노래 실력. 아무리 소극장 뮤지컬이라지만 그들의 노래 실력은 상상 그 몇 배 이상이었다.
실제 연주에 맞춰서 부르는 배우들의 노래가 너무 완벽해서 사실 극 중간까지만 해도 립싱크가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을 할 정도. 떨림도 없고 음색도 맑고 수준급 가창력에다 노래 자체는 또 얼마나 좋은지. 신나게 혹은 슬프게
주인공 각자의 테마에 딱 맞는 맞춤복을 입은 듯 너무 잘 어울리는 음악들이었다. OST 앨범이 나온다면 꼭 사리라
마음먹었을 정도.

 #2. 무대는 로봇 태권V?

연극 시작 직전 닥터리가 나와 관람 수칙들을 재치있게 설명해주었는데 무대가 바뀐다고 했을 때  별다른 기대는
안했었다. 기껏해야 소품들만 몇 개 바뀌겠지 하며 혼자 한계선을 그어버렸지만, 사실 잠시의 암전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비타민A를 다량 복용하였는지 그 어둠 속에서도 소리 없이 강하게 깔끔한 무대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침대 많은 병실에서의 장면전환에서 오는 배우들의 육체 노동은 기본. 박신부의 집무실
에서부터 주인공이 전화를 걸던 담벼락의 전봇대와 가로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면을 보여줄 수 있어 보다
효과적인 연출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더 가슴에 와 닿았었고.

 #3. 극 중간 중간의 느끼한 이벤트.

 약 100분의 공연시간동안 닥터리 주관 두 번의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는데,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미리 신청을 받아 편지를 전해준다던가, 선사시대에 유행했던 느끼한 멘트를 날리며 관객에게 장미꽃을 주던
이벤트는 나는 연기하고 너는 보는, 다만 브라운관과 실제의 차이뿐인  삭막한 무대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참여와 몰입을 유도하는 좋은 수단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내 앞에 앉아계셨던 여자 분이
깜짝 놀라며 남자친구의 편지를 받던데, 아- 나는 언제쯤 저런 이벤트 해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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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소심의 선두주자 간병인 정연이 닥터리를 따라 어색한 욕을 하던 장면과 담벼락 앞에서 자신의 이별을 노래
하는 장면. 그리고 극의 후반부 최병호씨의 배개 아래서 발견된 부치지 못한 수십개의 노란 편지와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슬픈 이야기까지 정말 어느 것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장면은 없었다. 보는 내내 감탄과 재미와 감동을
주었던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
 1차적으로는 극중 최병호가 사라진 그날 밤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다른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삶의 낙 없이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최병호가 딸과 재회를 한 것도, 주인공들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꿈을 꾸는 시간도, 다시 살아 숨 쉬는 내일을 맞이하기 위한 휴식의 시간도 모두 한밤중. 오! 당신이 잠든
사이, 밤은 희망을 재생하는 시간인 것이다.

 딱 한 가지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를 몇 번 봐서인지 어떻게 보면 내게
익숙한 형식을 강요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만큼 각자의 이야기를 발전시켜서 최병호씨의
이야기처럼 어떤 결말을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분명 시간상 혹은 다른 제약
들이 많겠지만.  같은 내용의 연극을 시기에 따라 다른 배우들의 연기로 관람할 수 있는 것이 롱런하는 좋은 연극의
특징인 것처럼, 혹 가능하다면 미드의 스핀오프 시리즈처럼 다른 이야기들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