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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짧고굵게

빛바랜 추억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생각의탄생 2008. 3. 1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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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 좁게 뻗은 골목길을 몇 번쯤 돌아 들어가면 나오는, 황갈색 벽돌로 지어진 2층 주택. 할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화초들이 놓여있는 작은 마당을 지나 신발을 벗고 본채로 올라서면 열려진 1층의 방에서는 커다란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보시던 할아버지가 계셨다. "우리 강아지" 하고 부르시는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오늘도 가지고 싶은 장난감 물총을 사달라고 조르던 철없는 손주녀석은 뭔가 재미있는 일을 생각해 냈다는 듯, 가파른 나무 계단을 쏜살같이 올라가 2층 제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몇 일째 밀린 매일학습을 뒤로하고 꺼낸 할아버지 그림을 쥐고 내려가 그 앞에서 자랑스럽게 펼쳐든다. 할아버지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을 점선 따라 세 줄이라고 표현했던 진지한 손주의 말 한마디에 허허허 할아버지 웃음소리 가득 찼던 방 안의 고물 라디오에선 그 날도 어김없이 황인용, 강부자씨가 진행하던 구수한 입담의 정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름이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는 대나무로 된 발이 닫혀있던 문을 대신했고, 조금의 여윳돈이라도 생기면 엄마 몰래 슬그머니 발을 들추어내고 나가 또 다른 골목 한 구석에 있던 조그마한 구멍가게로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담배'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그곳이 가게임을 부끄럽게 알려주는 듯 했던 공간에는 열려진 유리문 밖의 나무침상에

걸터앉아 더위에 이골이 난 듯한 표정으로 연신 부채질하시던 풍채 좋으신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그 옛날 빨래터에서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어머니들과 나누던 몇 마디 말이 어느새 수다가 되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구멍가게 할머니의 하루. 보물 가득했던 가게 앞에서 무엇을 살까 수없이 고민하던 나에게 한움큼씩 쥐어주시던 오색찬란한 무늬로 덮인 작은 박스안의 눈깔사탕과 입안 한가득 훌훌 털어 넣으면 시릴 만큼 새콤했던 오렌지 빛 과자와 지금은 사라진 종이 포장의 우유맛 아이스바. 어린 마음에 구멍가게 주인이라는 거창한 꿈을 꾸었을 만큼 가지고 싶었던 갖가지 물건들로 가득 찬 유리문 안쪽의 작은 공간에서 주머니 속 동전과 바꾸었던 것은 단지 몇개의 불량식품이 아니라 그 시절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가슴 한가득의 꿈과 재미가 아니었나 싶다.

무엇이 그리도 신났는지 몇 안되는 골목 친구들과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던 좁은 골목길에도 노을은 진다. 그리고 항상 그맘때 쯤 나타났던 리어카 끄는 할아버지. 낡고 커다란 가위를 착착 흔들어대며 넘어갈 듯 쉰 목소리로 '고물'을 외치던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어디론가 숨어서 숨죽인 채 그가 어서 골목을 빠져나가길 바랬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졸라 모아둔 고물을 팔아 달디 단 호박엿과 바꾸어오기를 바랬던, 그리고 또 한 해가 지나 무서워 숨기보다 그 앞을 후두두 뛰어가며 무어라 놀려대던 나와 동무들의 행동은 '어림'으로 이해되고 용서될 수 있을까? 낡은 옷과 땀으로 뒤범벅이 된 할아버지를 문간으로 불러 시원한 설탕물을 타 주시던 할머니의 따스함을 지금에서 보기 힘듦에 그 때가 더 그리워지는 것은 아닐까?

비록 어린 다섯해의 시간을 보냈고, 또 다른 장소에서 훨씬 많은 해의 기억을 모아나갔지만 그 곳은 새로운 시간으로는 덧칠할 수 없는 묘한 향수로 남아 아직도 가슴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때로는 희뿌연 망각의 안개에 가려져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강 저편에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음에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바로 지금, 생각하며 깨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미래의 길을 건너며 현재를 과거로 만들어가는. 어찌 보면 참 냉정한 일이지만, 지나간 일을 떠올리며 웃음 짓는 일 만큼은 지나치는 과거에 미안함의 사과 한마디를 건네는 일 같아 흐뭇한 느낌을 받곤 한다. 과거는 기억하면 다시 돌아와 머리로 떠올리고 가슴으로 추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갈 수 없음에, 그리고 빛바랬기에 소중한 추억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200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