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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것들

즐거운 편지 : 황동규

생각의탄생 2008. 10. 18. 22:56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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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성 영화가 유행하던 늦은 97년의 중학생 어린 소년은
영화 편지에서 정인이 환유에게 읽어주던 시에 감동받아
파란 화면 흰 글씨 가득하던 BBS 게시판을 헤매인 끝에
겨우 찾은 시를 외우고 또 외워 지금도 잊지 않게 되었다

한낱 사소한 배경쯤으로 자신의 사랑을 한없이 낮추고
기약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도 좋고
눈과 꽃과 낙엽으로 표현한 계절의 변화는 너무 간단하여
한 해의 흐름, 그 기다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좋다

다만 슬픈 것은 이 시를 처음 들려주었던 그녀가
이제는 기다릴 수도 없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이 시를 떠올릴 때마다 그 슬픔도 함께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사랑했던 그녀 최진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