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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본문

머리에서/그건그래

눈먼 자들의 도시

생각의탄생 2008. 12. 5. 13:03
나는 나를 본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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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


어제의 밤은 무척이나 길었다. 잠들 수 없던 새벽보다
더 길게 느껴졌던 것은 분명 두어시간의 꿈. 눈뜨자마자
본능적으로 신을 찾게 만들었던 그것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힘든 악몽이었다.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꿈의 기억에서 잘려나간 전후
사정보다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이 아닌, 너무나도 태연했던 내 모습이었다.
그곳은 내가 잠들기전 두 눈을 감아 나 자신에게 만들어
주었던 완전한 어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임을
확인한 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하게 선명했던 두 손의 붉은 피가 눈을 지나 가장 먼저 다다른 곳이, 죄책감이 아닌 본능적
방어기제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 살인의 순간. 내가 아닌 인류 보편의 기억에 의해
내 심장에 기록될 죄의 본질을, 누군가의 눈에서 찾아 지우려 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지만 그렇게 판단한 내 이성 뒤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그 두려움의 거울에 비친 모습.
그것은 꿈속의 또 다른 나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나라면 내가 죄를 저질렀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대상은 죄인가, 아니면 그것을 기록하는 나와 우리의 눈인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 꿈속 나의 범죄에 대해,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눈먼 자들의 도시.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게 된 사연은 대강 이와 같다.

2. 관계

지난밤 꿈처럼 그곳 사람들은 어떠한 극적 전개나 설명 없이 눈이 멀어간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중요한 것은 모두가 눈먼(Blind)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왜 모두가 한꺼번에 장님이
되지 않고 전염(Infection)에 의해 눈이 멀게 되는 것일까?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것이 거미줄처럼 연결(Link)되어 하나의
사회와 조직이 형성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유지해주던 이 관계에 의해 백색실명이 전염되고,
마치 영화속 대 도시의 정전처럼, 하나로부터 한 순간에 모두를 집어삼킨다.

3. 허상



그들이 모인 수용소의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악화되어간다. 아무 곳에서나 대소변을
해결하고 사랑을 나누며, 남들보다 먹이를 더 차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안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여자까지도 요구하던 모습은 문명 이전 완전한 힘의 세계로 돌아갔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수용소 안 그들의 모습은 과연 인간이 가두어 조롱하던 동물원 동물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단지 눈 하나만 보이지 않게 된 것 뿐인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수십세기에 걸쳐 인류가
쌓아온 문명은 마치 호 하고 불면 전체가 붕괴되어 버리는 카드로 쌓은 탑을 보는 것 같다.
문명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여태 근엄한 척 하고 살아왔다. 인간이 말하던 존엄(Dignity)의 이데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다만 남들이 그들의 눈으로 서로를 감시해왔기 때문에 껍데기뿐인 존엄성의 허상을 만들어내
연극을 해왔던 것이다. 즉, 나 자신을 보고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나를
보고 살아온 것
이다. 그것이 사라졌으니, 비록 허상 뿐이었던 그 존엄마저도 사라질수밖에.

- 비단 소설속의 일 뿐만이 아니다. 익명성의 뒤에 숨어 글자에 독을 담아 사람을 죽이는 악플러들.
얼굴을 가리기 위해 복면을 쓰는 강도의 심리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밤의 범죄율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들은, 누군가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지은 죄는 곧 사라지거나 감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인간의 착각을 단편적으로 나타내는 현실 사례들이다. 서두의 꿈에 대한 내 고민처럼 -

빛과 어둠을 구분시켜주는 너무나 위태로운 스위치, 눈(Eye). 다른 감각기관이 아닌 눈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인간

그렇기 때문에 눈먼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Nameless). 모두 보이지 않게 되어 구분이 사라지니
자연스레 그 구분의 수단이었던 이름은 필요없게 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이 끔찍한 기록들을
들춰내면서,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 인간의 추악한 단면을 몇 가지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한 병실의 항의로 전체 식량의 배급이 줄어들자 그 병실을 탓하고, 귀중품을 더 요구하자 더낸 곳은
피해를 본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누군가 3호실의 두목을 죽였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으면 식량 배급이
늦춰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오히려 그 누군가를 탓하고, 심지어 여자들이 팔려가야 하는 시기에는
그깟 다리 벌리는게 무슨 대수냐고 한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것은 아래의 내용들과도 이어진다.

둘째, 인간은 "억압될수록 순응하는 존재이다."
앞서 이야기했던것 처럼 인간은 억압을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순응하는 존재에 가깝다. 배급제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강자에 의한 배급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결국 수용소를 탈출하는 그 순간에도 오히려 자신들을 수용해주기를 바라는 모습들이
그것이다. 새장에 오래 가두어진 새는 나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니, 날고 싶지 않다. 

셋째, 인간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지에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살해하기 전 들른 카페에서 노파가 죽어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 우연과 필연을 덧칠해 자기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눈먼 자들을 지키던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사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거나, 남들도 다 한다는 생각들로 그들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인간은. 그들이 지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낱
먼지에도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런 끔찍한 상황들을 기록하기 위해,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다. 차라리 눈이
멀기를 바랬을 정도로 그것은 더 괴로운 소유였다. 하지만 그녀 덕분에, 그녀를 통해 우리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경험하고 우리 자신을 본다. 단 한명의 대리인. 노아에 대한 이야기(노아의 방주)가
그렇게 기록되었던 것처럼.

5. 조직

조직(System),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산 증인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조직은 자연스레
생겨나거나 또 소멸해가는 과정을 반복해왔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그들은 혼란속에서 붕괴되었던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삶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조직을 만든다.

하지만 조직이 반드시 순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가둔 것도 그들 스스로 만든 국가라는
조직이고, 수용소 안 끔찍했던 3호실의 사람들도 조직이다. 사라마구(저자)는 소설을 통해 조직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필요한 것이라 말하지만, 이처럼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보여주며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효과적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직된 일곱(Seven)명.

그들은 암흑의 바닥을
향해 헤엄치듯 끔찍했던
그곳에서 피어난 희망이며
작은 사회이다.
동시에 사라져가는 인간
존엄성의 증거이고 여기에
숨을 불어넣는 존재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각각의
의미를 부여해보았는데,
(약간의 종교적 의미도 포함)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는 - 아담과 이브. 즉 원죄를 짓게 된 남과 여를,
의사와 의사 아내는 - 눈을 고치는 사람이 눈이 먼, 가장 무기력함을 느끼는 인간과
                             모든 사람중 가장 능력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의 만남. 즉, 인간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소년은 - 인간 세상에 물들지 않은, 가장 순수하면서도 약한 존재를,
검은 안대를 쓴 노인은 - 잊혀져가는 인간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선인으로서의 지혜를,
검은 안경을 쓴 여인은 - 가장 천한듯 보이지만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로서, 효심 깊은 자녀로서
                                 사람의 마음을 먼저 알아보는 (노인과의 관계) 사람으로서의 희망적 존재

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6. 맺음말

어떠한 극적 반전도 없이, 소설은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모두가 갑작스레 눈을 뜨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눈먼 세상을 살아가는, 눈뜬 자들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 이라는 의사 아내의 이야기
처럼, 다시 눈을 뜬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사라마구는 경고(Notice)한다. 우리 모두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이라고.
내면의 눈을 뜨지 않으면, 우리가 굳건하다 믿는 이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이라고.

B (Blind), L (Link), I (Infection), N (Nameless), D (Dignity),
N (Notice), E (Eye), S (Seven), S (System)

이들이 혼재된 아나그램속 타인의 눈에 비친 세상.
우리는 지금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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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왜 백색의 실명인가. 선과 악을 백과 흑으로 구분해왔던 보편적 생각에 기초를 두고 이 실명이 누군가에
의한 벌이라 가정하면, 어둠이 아닌 백색의 실명이라는 점에서 그 벌을 내린 주체는 우리가 믿는 종교적
절대자. 바로 신이다. 그는 인간에게 상도, 벌도 주어왔지만, 결국 모든 인간을 용서하고 다시 자신의 품으로
맞아들이신다는 사실에서 이들이 실명함과 동시에 다시 눈을 뜨게 되리라는 암시와 복선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덧2.
문장부호 없는 거친 문체는 사라마구 문학의 특성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곤욕스러울 수도 있다. 어쨌든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의 이름이 없듯, 굳이 따옴표로 주체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덧3.
- 시간 날때마다 도입부에 대한 고민을 하고 또 했지만, 결국 지난 글에서 가져오고 말았다.
- A4지 한 장을 꽉 채울만큼 책을 읽으며 느꼈던 많은 생각들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채로
  급하게 완성되었지만, 조만간 다시 정리해볼 생각이다.
- 엠파스 리뷰에도 함께 등록함 http://review.empas.com/view/208761/review/50